호국의 다리 이 전에 주민의 다리, 내 추억이 물든 곳.
“ 언니야! 왜관에 다리 무너졌데 들었나? ”
전 날의 업무과도로 늦잠을 청했던 나는 오후 11시쯤 동생의 전화를 받고 깼다.
“ 뭔 소리고? 그게. ”
“ 왜관에서 우리 집 들어가는 다리 말이야 그거 무너졌다고! 4대강 공사 때문에 무너졌다는데, 완전 짱난다 진짜! ”
그때도 사실은 다리가 무너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인터넷을 열어보니 검색어 1위에 왜관철교붕괴가 적혀있었고, 클릭을 한 순간 정말 무너진 다리 사진들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제야 다리가 무너진 게 실감이 됐고 내 다리가 잘려나간 것 마냥 가슴이 아팠다.
경북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우리 집 주소의 일부다. 옛, 왜관철교 지금은 호국의 다리. 낙동강대교라고도 불렸던 이 다리는 칠곡군 왜관읍과, 약목면을 잇는 다리로, 주민들의 도보로 이용되는 다리다. 왜관철교, 호국의 다리보다 그냥 다리거리로 불렸던 그 다리가 무너지다니, 그것도 6월 25일 날, 어떤 말로도 그 심정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길이 469m 폭 4.5m의 이 다리는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단선철교로 시작이 되었다.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낙동강이 최후의 저지선이 되었고, UN군이 북한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이 다리를 폭파했었다. 그래서 다리모양이 온전하지 않은데, 1970년대 현재 형태로 복원하여 1993년부터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교로 사용되었다. 이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까지 주민들의 진짜 다리가 되어 주었던 다리다.
초등학교 다닐 적엔 읍내에(왜관읍이니까.. 읍내) 시장이 서면 나는 그 다리로 엄마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갔고, 몸이 아프면 그 다리를 건너서 병원에 갔었다. 중학교 때는 매일 같이 그 다리를 걸어서 학교에 갔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에 아무도 없으면 워크맨을 귀에 꽂고 처음 배웠던 팝송을 흥얼거렸다. 친구와 그 다리를 걸으면서 꿈에 대한 얘기도 했었고, 한 밤에 다리에서 올려다본 하늘에 뜬 별을 보면서 꿈을 다 잡기도 했었다. 조금 머리가 자랐을 때는 그 다리를 걸으면서 “살 빼서 예뻐져야지, 이렇게 강을 건너면서 좋은 공기 마시고 운동을 하는 나는 정말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 운동을 했었다. 그렇게 그 다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초등학교 친구도 만나게 되고, 운동 나오신 친구 부모님, 옆집 아주머니, 어릴 적 자주 인사드렸던 할아버지도 만나게 된다. 늘 곁에 있었던 다리기 때문에 대학교를 다닐 때는 다리의 소중함이라기보다는 우리 집에서 왜관까지 걸어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만 생각이 되었다. 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처럼 다리는 점점 그런 존재가 되어 갔다.
언제부터인가 다리에 대해 다시 의식을 하기 시작했는지 되돌아보니 4대강 사업이 우리 집 앞에도 진행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부터였던 것 같다. 칠곡보가 들어선다고 주민들은 어쩌면 땅값이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왜관일대가 관광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지 보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전국적으로 4대강 사업의 문제를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도 왜관, 약목, 내가 사는 그 일대의 주민들은 조용했다. 이해는 되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부산에서 대학교를 졸업 하고 미디어 운동을 하게 되면서, 4대강 사업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 앞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불과 얼마 전부터 하게 되었는데 그 관심에 부응이라도 한 건지... 결국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같이 그 지역에 살았던 한 친구한테 다리가 무너진 날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오래 된 다리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얘기했는데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온전히 오래된 탓일까? 4대강 사업의 탓일까? 아직도 의문이 들지만 너무나도 명백한 이유들이 하나 둘 제기 되는 것을 보면 4대강 사업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2011년 6월 25일 새벽. 그렇게 다리가 무너졌고, 하루 빨리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분노를 하더라도 더 분노하고, 슬퍼하더라도 더 슬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닿아 바로 다음 날 부산에서 왜관을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사실 왜관으로 향하는 내내 사진에서 본 그 모습이 아니 길 바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 직접 본 다리의 모습은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몇 발 만 가면 저 쪽으로 갈 수 있는 거린데, 그렇게 큰 구조물이 물살에 못 이겨 무너졌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자연 앞에서 겸손 하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기도 하고, 다리 앞에서 카메라를 드는 내내 믿기지 않는 광경에 마음이 아팠다.
다리거리는 호국의 다리이기 전에 병원을 가고, 시장을 가고, 친구를 만나고,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는 주민들의 다리로써의 역할을 하는 그런 다리다. 그런 다리가 무너졌다. 주민들의 다리가 부러졌다. 내 추억이 곳곳에 물들어 있는 이 다리가.. 4대강 사업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려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이렇게 아프게 하는지... 엄마는 다리 앞에서 한동안 멍하게 서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 아버지 생신 때문에 잠시 집에 갔었다. 다리가 무너져서, 임시방편으로 집 앞에서는 왜관읍으로 나가는 무료버스는 30분에 한 대 씩 운행하고 있었고, 차도로 이용되는 철교 옆의 다리에 임시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고 있었다. 차들과 함께 다리를 건너야 하는 어쩌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서 주민들은 한동안 시장을 가야되고, 병원을 가야된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다리가 복원이 된다고 해도 예전에 그 모습 그대로, 내 추억이 물들어 있는 그대로 돌아올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늘 그대로 거기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큰 상실감으로 전이 된 건지, 그만큼 다리가 무너졌다는 것은 내게는 추억이 없어졌다는 것으로 귀결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은 빨리 다리가 복원되기 보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조금 갖고,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한 번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4대강 사업 때문이든, 다리가 오래 된 것 때문이든 그렇게 주민들의 다리가 되어 준 다리의 소중함을 조금은 알았으면 좋겠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자연의 소중함, 늘 거기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착각 아닌 착각도 한 번쯤 의심을 해봤으면 좋겠다. 자연의 소중함, 다리의 소중함이 다시 한 번 절실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