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놀기 위해 만들어진 오지필름이 2011년 7월 31일부터 8월 8일까지 첫 여름휴가를 떠납니다.
거의 잠적 수준이죠...ㅋㅋ

둘이 같이 가냐구요?
절대 아니죠~~ 그럼 아마 휴가가 아니라 또다른 일의 연장이겠죠.
문대표는 작년처럼 정동진독립영화제 자원봉사를 위해 강릉으로 떠나구요.
일개감독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영화제가 시작 할 때 즈음 정동진으로 향할 예정이랍니다


어느날 문대표가 일개감독에게 물었습니다.
"감독은 10년 뒤에 오지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나?"
주저없이 일개감독은 대답했습니다.
"전 정동진독립영화제 오지가 쏜다~로 기획해서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모두 모시고 여름휴가 가는게 10년 뒤 오지의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 2010년 정동진 독립영화제에서.


문대표와 일개감독은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정동진독립영화제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올해 오지가 쏜다를 하진 못하지만 즐겁게 정동진을 향할 생각입니다.
별이 빛나고 기차가 지나가고 술과 고기가 있고 낭만이 가득하며 당연히 영화가 있는 세상 정동진독립영화제!!!
혹 이 글 보시고 찾아오시는 분들은 정동진에서 술과 안주는 오지가 쏘겠습니다^0^

어제 오지 상반기 평가를 했는데, 스스로에게 만족 할 만한 활동을 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짧은 휴가를 다녀와서 정말 만족 할 수 있는 활동 이어나가겠습니다.





참! 참! 참!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선 아니지만 "나비와 바다" 첫 시사회가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정동진에 오시면 모두 즐길 수 있을터이니 고~고~싱~~ㅎㅎ
따라와~~~잉!!!

가편을 끝낸 <나비와 바다> 


  지난 5월 21일 <나비와 바다>의 주인공 우영아저씨와 제제언니가 결혼을 했습니다.

5월 제작 보고에서도 언급했지만, 결혼식을 마지막으로 <나비와 바다>의 실제 촬영은 마쳤습니다.

5월 중순 박배일 감독은 <나비와 바다>를 편집하기 시작했는데요. 7월 말 어느덧 1차? 아니 2차 ..3차의 가편집을 거쳐 후반편집 작업을 남겨둔 완성본에 가까운 작품이 나왔습니다.

스텝시사회도 3번, 가편시사회 2번을 거치면서 구성도 약간씩 변하고 했습니다.

장르는 로맨스호러다큐멘터리 !

여러분~! 기대되시죠?

 


현재 자막작업을 진행 중에 있구요 ,

8월 중순쯤에는 색보정 작업과 사운드 믹싱 작업을 예정 중에 있습니다.

그렇게 후반편집과정이 끝나면 드디어 ,

로맨스호러다큐 <나비와 바다> 를 만나실 수 있어요!!!!!


사실 처음에 <나비와 바다> 라는 매력적인 구성안을 보고 너무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쳐 결국 조연출로 합류했지만, 

감독님께 많은 보탬이 되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

아직 작품이 나오지 않았고, 감독님은 ‘이제부터 조연출 니가 할 일이 많다 ’

하시는 말에 그나마 조금 안도를 했습니다.


사실 영화 한 편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여러분들도 잘 아실거에요


 



더벅머리 되가는 감독...


 



편집에 또 편집, 더벅머리가 되어가는 감독님을 보면서 정말 창작의 고통이란 것이 저런 것이구나... 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만큼 감독님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구요.

 


시사회를 할 때 마다 작품에 점점 동화되어 가는 제 모습을 보면서, 좀 더 날카로워 져야 되는데 작품에 동화만 되고 있어서 제 스스로도 많이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어느 덧 거의 완성된 작품 한 편이 마무리 되고 있는 과정에서 너무 뿌듯하고, 또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이 정말 대단하고 멋져 보이기까지 합니다.


                                                                                                ▲ 더벅머리가 되어가는 박배일 감독.




장애인의 사랑다큐멘터리로만 알고 계신분들은 조금 긴장을 해주시구요!

생각이상으로 평범하지만 그 평범이 과연 평범한 것일지.. 많은 고민을 안겨줄 작품이라 생각되구요.
가장 폭력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가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작품이 조만간 나올 듯 합니다.



끝까지 지켜봐 주시구요, 관심 아끼지 마세요. ^---^

 

 






새벽부터 억수같이 내린 비에,
하늘에 구멍난 줄 알았습니다.

물난리에 전국이 복구작업에 열중인데..
여기저기 안타까운 소식에 문대표는 너무 슬펐습니다.

컴퓨터 작업하면서 안타까운 소식 보면서
통탄하고 있는 가운데,
박감독님이 , "오늘 어때 ? 김치전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습니다 ,
요즘 날로 , 오지필름에서 몸보신도하고 ,
김치전까지 부쳐먹을 수 있는 여유가 .... 없는데....(실속없이 일하는 문대표라...)

아무쪼록, 오늘 박감독님은 쉐프 박!

으로 변신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부엌에서 전을 굽던 쉐프 박..
사진이 없어 증명할 길이 없지만 ...

아무튼 엄청 맛있는 해물반김치반인 김치해물전이 탄생했습니다. !!

짜잔~!


                    ▲ 쉐프 박의 야심찬 김치해물전.



오지인들 끼리만 맛있는 김치전을 먹을 수 없어 ,
초대도 했습니다. 비록 명환군 혼자 와줬지만,
그래서 더 오붓하게 김치전 먹었어요!!



                    ▲ 막걸리 한 잔 먹고, 얼굴에 홍조를 띤 명황군.

                  ▲ 막걸리,  냄비뚜껑 위의 김치해물전, 명환군과, 쉐프 박!


페이스 북에 사진을 올렸는데 ,

어찌나 반응이 폭발이던지...
문대표는 깜짝 놀랐습니다.
쉐프 박의 야심찬 맛!!! 두둥!!!

이 맛이 궁금하신 분들은 언제든 오지로 놀러 오세요 !!
항상 열려 있습니다. !!!!


김치해물전과 , 오고가는 심도깊은 대화 속에 오지의 우정은 그렇게 또 한 층 두꺼워 졌고,

오지필름의 하루도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


여러분 ~
오늘도 여유롭게 ~~~



한 달 하고 10일 만에 18會動  8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번 모임은 오랜만에 만난 탓에 ,
토론보단 안부 묻기에 더 집중을 한 것 같아요 ~

고등학생 동혁군도 여름방학을 했고 , 학기 초에 짧았던 머리도 많이 길었습니다.

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것 같은데 ..
머리속에 이 책의 내용들이 잘 들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



전쟁 속에서 다큐멘터리


이번 모임에서는 세계다큐멘터리 영화사 3장. 다큐멘터리 사회참여 부분에서

나팔수 : 전쟁의 선봉에 서서 와, 전범을 고발하다 를 읽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이번 장은 사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어요~
나팔수 : 전쟁의 선봉에 서서 부분은 전쟁 중에 다큐멘터리 영화가 어떻게 활용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전범을 고발하다는 말그대로 ,
전쟁 범죄를 고발하는 역할을 다큐멘터리가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토론이 끝나고 알랭 레네가 감독을 한 <밤과 안개>를 감상했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에 20여분 동안 인상이 펴지지 않았는데요 ..




- 1955년에 찍힌 이 다큐멘터리는 나치 유태인 수용소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뉴스릴 등 유태인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잔혹한 장면과 함께, 잡초가 우거진 수용소, 버려진 녹슨 침대의 현재 모습이 병치된다. 실제로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Jean Cayrol 이 직접 쓴 나레이션은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더 깊이 있게 만든다. (Daum 영화 발췌)





전쟁을 겪으면서 다큐멘터리는 영상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전쟁을 거치고 있는데 , 왜 ? 굳이 ? 카메라를 들었어야 했나 하는 어리석은 질문에 , 
역사적인 사실을 카메라가 없었다면 기록을 한다는 생각을 못했겠지만,
카메라가 있었고, 영화라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한 당연한 선택이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책과 사진, 영상이 있을 때,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을 말한다면 ,
당연히 영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눈으로 직접보고 느낄 수 있으니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거라 생각이 되는데요 ,

다큐멘터리의 영향력도 여기서 오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다큐멘터리는 처음 장르가 등장할 때 부터 정의하기를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진 영상이라는
것 때문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이라고 믿게 하는 것 때문에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 배우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영상입니다.

이 장을 공부하면서 책에서 이야기하는 전쟁중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과 , 그 사건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세계의 보도 기관으로 부터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기록적인 측면에서, 영화적인 측면에서 많은 학자들에 의해 회자되고, 영상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학습자료로 활용됩니다.

이런 것들을 봤을 때, 전쟁기간 동안 다큐멘터리 영화가 높은 지위를 획득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이번 모임의 정리는 이정도로 하겠습니다.


다음 모임 때 만나요 !

 




호국의 다리
이 전에 주민의 다리, 내 추억이 물든 곳.

 

언니야! 왜관에 다리 무너졌데 들었나? ”

 

전 날의 업무과도로 늦잠을 청했던 나는 오후 11시쯤 동생의 전화를 받고 깼다.

 

뭔 소리고? 그게. ”

왜관에서 우리 집 들어가는 다리 말이야 그거 무너졌다고! 4대강 공사 때문에 무너졌다는데, 완전 짱난다 진짜! ”

 

그때도 사실은 다리가 무너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인터넷을 열어보니 검색어 1위에 왜관철교붕괴가 적혀있었고, 클릭을 한 순간 정말 무너진 다리 사진들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제야 다리가 무너진 게 실감이 됐고 내 다리가 잘려나간 것 마냥 가슴이 아팠다.

 

경북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우리 집 주소의 일부다. , 왜관철교 지금은 호국의 다리. 낙동강대교라고도 불렸던 이 다리는 칠곡군 왜관읍과, 약목면을 잇는 다리로, 주민들의 도보로 이용되는 다리다. 왜관철교, 호국의 다리보다 그냥 다리거리로 불렸던 그 다리가 무너지다니, 그것도 625일 날, 어떤 말로도 그 심정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길이 469m 4.5m의 이 다리는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단선철교로 시작이 되었다.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낙동강이 최후의 저지선이 되었고, UN군이 북한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이 다리를 폭파했었다. 그래서 다리모양이 온전하지 않은데, 1970년대 현재 형태로 복원하여 1993년부터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교로 사용되었다. 이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까지 주민들의 진짜 다리가 되어 주었던 다리다.

 

초등학교 다닐 적엔 읍내에(왜관읍이니까.. 읍내) 시장이 서면 나는 그 다리로 엄마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갔고, 몸이 아프면 그 다리를 건너서 병원에 갔었다. 중학교 때는 매일 같이 그 다리를 걸어서 학교에 갔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에 아무도 없으면 워크맨을 귀에 꽂고 처음 배웠던 팝송을 흥얼거렸다. 친구와 그 다리를 걸으면서 꿈에 대한 얘기도 했었고, 한 밤에 다리에서 올려다본 하늘에 뜬 별을 보면서 꿈을 다 잡기도 했었다. 조금 머리가 자랐을 때는 그 다리를 걸으면서 살 빼서 예뻐져야지, 이렇게 강을 건너면서 좋은 공기 마시고 운동을 하는 나는 정말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 운동을 했었다. 그렇게 그 다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초등학교 친구도 만나게 되고, 운동 나오신 친구 부모님, 옆집 아주머니, 어릴 적 자주 인사드렸던 할아버지도 만나게 된다. 늘 곁에 있었던 다리기 때문에 대학교를 다닐 때는 다리의 소중함이라기보다는 우리 집에서 왜관까지 걸어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만 생각이 되었다. 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처럼 다리는 점점 그런 존재가 되어 갔다.

 

언제부터인가 다리에 대해 다시 의식을 하기 시작했는지 되돌아보니 4대강 사업이 우리 집 앞에도 진행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부터였던 것 같다. 칠곡보가 들어선다고 주민들은 어쩌면 땅값이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왜관일대가 관광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지 보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전국적으로 4대강 사업의 문제를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도 왜관, 약목, 내가 사는 그 일대의 주민들은 조용했다. 이해는 되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부산에서 대학교를 졸업 하고 미디어 운동을 하게 되면서, 4대강 사업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 앞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불과 얼마 전부터 하게 되었는데 그 관심에 부응이라도 한 건지... 결국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같이 그 지역에 살았던 한 친구한테 다리가 무너진 날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오래 된 다리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얘기했는데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온전히 오래된 탓일까? 4대강 사업의 탓일까? 아직도 의문이 들지만 너무나도 명백한 이유들이 하나 둘 제기 되는 것을 보면 4대강 사업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2011
625일 새벽. 그렇게 다리가 무너졌고, 하루 빨리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분노를 하더라도 더 분노하고, 슬퍼하더라도 더 슬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닿아 바로 다음 날 부산에서 왜관을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사실 왜관으로 향하는 내내 사진에서 본 그 모습이 아니 길 바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 직접 본 다리의 모습은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몇 발 만 가면 저 쪽으로 갈 수 있는 거린데, 그렇게 큰 구조물이 물살에 못 이겨 무너졌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자연 앞에서 겸손 하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기도 하고, 다리 앞에서 카메라를 드는 내내 믿기지 않는 광경에 마음이 아팠다.

 

다리거리는 호국의 다리이기 전에 병원을 가고, 시장을 가고, 친구를 만나고,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는 주민들의 다리로써의 역할을 하는 그런 다리다. 그런 다리가 무너졌다. 주민들의 다리가 부러졌다. 내 추억이 곳곳에 물들어 있는 이 다리가.. 4대강 사업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려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이렇게 아프게 하는지... 엄마는 다리 앞에서 한동안 멍하게 서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 아버지 생신 때문에 잠시 집에 갔었다. 다리가 무너져서, 임시방편으로 집 앞에서는 왜관읍으로 나가는 무료버스는 30분에 한 대 씩 운행하고 있었고, 차도로 이용되는 철교 옆의 다리에 임시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내고 있었다. 차들과 함께 다리를 건너야 하는 어쩌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서 주민들은 한동안 시장을 가야되고, 병원을 가야된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다리가 복원이 된다고 해도 예전에 그 모습 그대로, 내 추억이 물들어 있는 그대로 돌아올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늘 그대로 거기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 큰 상실감으로 전이 된 건지, 그만큼 다리가 무너졌다는 것은 내게는 추억이 없어졌다는 것으로 귀결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은 빨리 다리가 복원되기 보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조금 갖고,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한 번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4대강 사업 때문이든, 다리가 오래 된 것 때문이든 그렇게 주민들의 다리가 되어 준 다리의 소중함을 조금은 알았으면 좋겠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자연의 소중함, 늘 거기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착각 아닌 착각도 한 번쯤 의심을 해봤으면 좋겠다. 자연의 소중함, 다리의 소중함이 다시 한 번 절실한 순간이다.


투쟁 185일이 되는 날, 희망버스 185대가 출발합니다

첫 희망버스가 준 연대와 감동의 파도가 여전히 넘실대고 있습니다.
그 파도를 또 타자고 제안하는 분들이 여기저기서 나오면서 너도나도 두번째 희망버스를 꾸리려고 합니다.
파도에 파도를 더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힐 '쓰나미'를 불러옵니다.

plogTV에서는 7월9일 '희망버스 185'에 동참하시거나 지지하시는 분들의 인증사진이나 인증동영상을 모으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모인 사진과 영상들을 편집해서 공유할 예정입니다.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 문제의 해결을 넘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위기의 큰 희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께하시려는 분들은 
http://www.plogtv.net/39 
로 접속하셔서 연대를 표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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