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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會動

18會動, 4월 9일 5번째 모임.


18會動 이 어느 덧, 5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책도 바뀌었구요~ 함께할 식구도 늘었습니다 ^o^
그동안 영화보기에만 참여 했었던 허주영 씨가 다큐멘터리 공부도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새로운 책부터는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저와 동갑내기인 친구 강성호 군이 박배일 감독의 지인을 통해서 18會動을 알게되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18會動 은 여러분들께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만년 4명으로 쭉 나갈 줄 알았는데 어느 새, 7명의 식구로 늘어 났네요~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



이번에 공부할 책은 '다큐멘터리 영화사를 좀 더 파헤쳐봐야겠다'는 의견과 , '다큐멘터리 영화사를 잘 모르겠다'는 멤버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에릭바누의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 라는 책을 공부 하기로 했습니다.

책이 두껍고, 멤버들이 늘어난 관계로, 조금씩 읽고, 깊이 파헤쳐보기로 했구요~
단편 다큐멘터리를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저자 에릭 바누 지음 역자 이상모 옮김 출판사 다락방 |

참석자 : 박배일, 허주영, 김현아, 안명환, 한동혁, 문창현, 강성호

1. 영화의 탄생 _ 움직이는 사진

2. 개쳑기의 다큐멘터리 _ 탐험가 : 미지의 세계로 

2 단락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1장에서는...

우선, 영화의 탄생 1장을 통해서 움직이는 사진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하면서, 영화라는 장르가 태동했어요.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을 우리는 영화의 시초로 알고 있습니다. 에디슨과 달리 뤼미에르형제는 좀 더 실용적으로 촬영기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하게 되지요.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역을 담당하게 됩니다. 아주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요. 하지만 이때까지도 영화라는 용어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뤼미에르 이후 발명기에 판권을 중심으로 경제적인 입지가 생기고 뤼미에르가 경제적으로 성공에 이르자, 그 영향이 전 세계적으로 퍼집니다. 영화 산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촉진되고 이 때, '시네마'라는 단어가 영화를 상징하는 단어로 통용되기 시작 합니다. 1897년 이후에 일입니다.

아시아에서도 세계적인 열풍에 힘입어 변사가 스크린앞에서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상영이 되었구요, 장치가 개선되어 긴 필름이 만들어짐으로 더 긴이야기를 대중에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해도 기록의 의미에 중심을 두었던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가 위세를 몰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 위세에 눌렸던 극 영화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관객도 이에 흥미를 보이면서 다큐멘터리는 점자 수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열기가 식어갑니다. 1907년의 이야기 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너무 빠른 성공이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지요.

또 한, 편집기술이 발전하면서 영화를 통한 의미 전달이라는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영화가 세계 여러 통치자들과 관련되면서 군의 지도자와도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특히 식민지를 가졌던 제국주의 국자에서 활발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쟁장면과 같은 조작된 장면을 다룬 영화들이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구요.  이것이 기획작업으로 취급되었다고 합니다. 선전의 의미로 말이지요.

보레스라브 마투체브스키가 말했습니다.
 '영화 작품이란 도장이나 메달, 장식용 도자기, 조각 등의 예술품에 필적하는 것이다.' 고 주장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의 보존을 위해 그리고 국민들의 생활모습을 단편적이나마 기록 보존하기위해 영화박물관이나 보관소설립을 제안했다고 해요.
또 한 '역사적인 사건은 이를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의 눈앞에서 항상일어나지는 않으며, 원인보다는 결과가 세상에 더 잘 드러나게 마련, 카메라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사건도 찍어야 하고 , 카메라가 이렇게 쓰여질 수만 있다면 이 세계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라고....

이후 다큐멘터리 작품에 대한 관심이 줄어 들면서 제작자들은 탐험가로서 작품을 찍어댑니다.


비주류, 주류...


다큐멘터리가 비주류, 영화가 주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큐가 영화에서 쫓겨난 느낌이 너무 든다. 현시대의 다큐멘터리의 입지를 보면....
1895년 열차의 도착이 처음 영화로써 관색들에게 보여졌을때 관객들은 엄청나게 그 것에 대해 놀라고, 열광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불과 2년만에 그것에 적응했고, 뭔가 더새로운 것들을 추구 하기 시작했다. 다큐가 쇠퇴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자들은 새로운 세계 ,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더 찾아 나섰다. 

사실 이런 식으로 영화계의 작품들이 성행해 왔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결국엔 고갈 될 것이다. 
다큐를 만드는 사람으로써 잔인한계절을 끝냈고, 나비와바다 그 다음에 또 무슨 이야기들을 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한다. 세상에 할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다 적응해버렸다.

1895년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열차의 도착이라는.... 사람들은 거기에 자기가 찍혔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찾았다. 관객들이 제발로 찾아가는 경우가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하면 무관심이나 냉소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맞다. 현재 대한민국 현실을 생각해봐라,  나같아도 이 빡빡한 세상에 , 현실보다 더 답답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영화는 보기 싫다. 사람들이 독립영화를 더 안 찾는 것은 이유가 있다.

1만이면 손익 분기점이라고 한다. 이조차 힘든 것이 독립영화계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보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었다. 엄마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많이 봤고, 그래서  영화에 관한 꿈을 갖게 되었는데, 사실 사람들은 어떤 계기가 없으면 영화관을 찾기 조차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독립영화를 찾는 다는 것 더 힘든것 같다.

영화의 상업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좋은 영화는 곧, 상업화된 상업영화라는 인식이 많다. 대중적으로 좋게 평가되는 영화. 사실 사람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이나, 에피소드들, 안좋아 할 사람은 없다.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 지니까... 만드는 사람의 가공능력과, 편집 등의 과정에서 좋은영화 ,그렇지 않은 영화가 판가름 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때 상업성만 생각해서 작품에 임한다면 분명히 놓치고 가게 되는 부분이 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검열되어지는 부분이나, 혹은 감독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을 늘어놓기 보다 대중들의 입맛을 맛추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빠지게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불편한 진실 같은 진실도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까다로운 관객들에게 잘 전달해 주느냐는 정말 힘든 문제다.

감독의 목표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 생각한다. 대중의 코드에 맞게 영화를 만들면 획일화 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하다. 어떤이의 코드를 고민해서 그것에 맞게 짜여진 틀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의 가치가 전적으로 감독한테서 나오는데, 그러니까 관객을 끄는 코드를 선택하지 않으면, 그런게 없으면, 과연 감독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관객을 의식하고 , 입맛에 맞추는 최소한의 노력은 하되 감독의 소신을 잃을 정도로 영화의 내용이나, 구성적인 측면을 포기해선 안된다.

예술적가치로 영화를 표현했는데 흥행하고, 흥행하지 않은것은 '상업화 된 것이다'. '되지 않은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나? 고민이다.

2장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시기를 개척기라 표현한다.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누구나가 개척자 혹은 탐험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고자 했다. 로버트 플래허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6개월 동안 북그에 머물면서 이누잇족을 촬영했다. 다큐멘터리의 시초라고 불리는 '북극의 나누크' 이 작품으로 떼돈을 벌게되지만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에 대해서 많은 질타를 받게 된다.  우리가 종종 듣는 다이렉트시네마,  시네마베리테를 공부할 때도 북극의 나누크로 예를 들곤한다. 이처럼 극장에서 상영된 최초의 다큐멘터리, 라는 칭송에 걸맞게 북극의 나누크는 다큐멘터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은 보게되는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좀더 북극의 나누크를 살펴보면,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나누크는 플래허티가 작품을 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플래허티의 요구에 늘 ' 잘 알겠습니다. 무엇보다 영화촬영이 우선이지요' 하면서 영화촬영에 쏟은 열정이 플래허티 못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플래허티는 또 한, 이전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와는 달리 극영화에서 사용하는 촬영 기법을 잘 숙지하여 실제로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나누크와 북극의 모습을 담았다. 초현실적인 기법....... 혹은 감성에 호소하는 강력한 힘을 어떻게 하면 끌 수 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내는 중심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아마도 플래허티의 센스가 녹아있는 자막이 아닐까 생각한다. 간결하면서도 호소력있는 문장을 구사하고, 지나친 설명을 피하는 등의 자막센스는 플래허티만의 장점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북극의 나누크가 성행한 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영화산업에도 침체기가 온다. 플래허티는 이 후에도 탐사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지만, 영화사들로 부터 싸늘한 외면을 받고, 가까스로 개봉을 하게 된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새로운 장르를 정착시켰지만, 비판세례도 많이 받았던 플래허티.. 영화촬영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극단적인 위험에 처하는 것을 불사.. 영화속 나누크는 실제로 병을 앓고 있었고, 플래허티가 처음으로 찍었던 북극의 모습, 나누크의 모습이 편집을 거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자료가 소실되어 재촬영을 거치는 과정에서 플래허티의 연출이 어마어마하게 작용했다는 부분 등에서 북극의 나누크가 과연 다큐멘터리가 맞는가?는 논란의 여지는 아직도 식지않고 있다. 

플래허티가 이러한 비판들을 받았음에도 칭송되는 이유?
에스키모에세 심취한 이유를 살펴보면... 문명에 의해 고통받는 원주민들에 대한 자책감이 스스로 일었고, 그 원인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자신 역시 타민족의 문화를 파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또 한 문명이 침입하지 못한 지방에서 토착민들이 지닌 풍습을 그대로 찍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충분히 있다. 플래허티가 말하길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북극의 나누크>를 제작해야 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참회의 심정과 토착문화에 대한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온 세계에 알리고 싶었은 뿐이다.'

존 그리어슨이 플래허티를 비판하는 이유
북극의 나누크에 등장하는 낭만주의를 비판한다. 나누크 일가의 옷, 모포는 멘체스터 회사의 제품, 위니펙의 백화점에 구입한 것들 라디오에서 모피가격을 전해듣고 있으며, 뉴욕에서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플래허티는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북극의 나누크 이후에는...
신기한 모습, 피상적인 묘사에 그치는 작품들, 각본이 있는 , 오락성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북극의 나누크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탐험다큐멘터리는 쇠락하게된다.

플래허티는...  

어떻게 보면 플래허티는 예술적인 감각보다 학자적인 감각이 더 뛰어났던 감독이었다. 북극의 나누크를 인류학자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서술하고 있다. 

기록적인 측면에 더 중심을 두고 작품을 만든것 처럼..

나누크일가의 풍습을 사랑한 것이아니라, 풍습을 기록하는 것을 사랑했다. 촬영 도중에 연출을 과감히 시도한 것 , 예를 들어 나누크는 현재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나, 예전에 이누잇이 그렇게 살았던 풍습을 재현하게 한 것들을 살펴보면...

조금 충격적인것은 , 나누크 일가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플래허티는 카메라를 놓지 않고, 더 요구하는 태도를 보였다. 

여기서 다큐멘터리스트의 윤리성에 대해 토론해 볼수 있겠다.

퓰리처샹을 받았던 독수리와 기아, 용산참사를 지켜봤던 카메라맨들, 플래허티가 나누크의 위험을 방치한 것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휴머니즘, 윤리성 카메라를 든 사람의 입장에서 정말 고민 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다큐멘터리스트의 휴머니즘과, 윤리성... 이 부분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으나, 
많은 양의 정보를 수기로 작성할 수 없는 한계로 이정도만 정리합니다. 

아직 공부하지 않은 3,4장을 통해서 더 많은 이야기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