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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會動

18會動, 6월 4일 7번째 모임.

 

세계다큐멘터리 영화사 책.
3장 다큐멘터리의 사회참여 - 애국적 다큐멘터리를 읽고 토론했습니다.

이 장은 다큐멘터리를 애국의 도구로 활용했던 감독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대부분이 작품에 대한 해설들이었구요, 그래서 간단하게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애국적 다큐멘터리

존 그리어슨이 등장합니다. 드디어!

존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 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데요,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즉, 사회현상의 인과관계를 암시하는 방향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이것을 ‘현실을 다듬는 망치’라 표현했습니다. 또한 평범한 민중과 그들의 존엄성을 찬미하는 것이 다큐멘터리라고 했습니다.

이 책에서 존 그리어슨이 말하길,

‘나는 영화를 일종의 설교단으로 보고 있다’ 영화가 당시 교회나 학교가 담당하고 있던 교육적 역할을 맡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제작자이기 전에 선전가가 되라고 강조하면서 영화란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라고 했지요. 영화의 역할이란 국민을 계도하는 교육 활동의 차원을 넘어서 국민 복지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계몽활동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리어슨의 첫 감독, 제작한 작품 <유망선>(1929)은 '증기와 강철의 서사시'로서, 노동자에게 노동의 존엄성을 부여한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그는 EMB 내 필름유니트를 결성합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배우는 입장이었고, 선술집을 자주 찾았다네요. 이 모임은 세미나 풍으로 깊이 있는 대화내용과 날카로운 비평을 자주 했습니다. 노동자에게 정당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부와 기업의 스폰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내용이 두루뭉술했습니다.

이 장에서 주목할 작품은 바로 <실론의 노래>(1935)입니다. 실론의 문화를 찬미하면서도 제국주의의 매개체인 홍차의 역할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사람들에게 시장개척의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사운드 트랙 실험적이었고, 1934년 EMB 해체와 함께 런던 우체국 산하의 GPO안에 필름 유니트가 속하게 되고 여기서 완성이 됩니다.

<주택문제>라는 작품은 폐허가 된 빈민굴을 부수고 국가에서 주택을 건설한다면, 사회가 근대화 될 뿐만 아니라 가스등의 수요도 증대된다며 관련 기업을 설득했다. 그러면서 폐허가 된 빈민들의 실상을 알리는데 주력했습니다. 여기서 사운드적 실험은 직접증언(인터뷰)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존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던 선입견을 몇 년 안에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외딴 곳 인물들을 인간적인 친밀감으로 부각 시키는 장편영화에서 비개인적인 사회문제를 다룬 단편영화로 어떤 입장을 분명히 내세우는 형태로의 변화 말이죠.

존그리어슨이 이렇게 다큐멘터리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 사이의 세계적인 추세를 살펴보면, 독일의 다큐멘터리는 히틀러 정권의 대중계몽을 위해 선전장관인 요셉 괴벨스는 독일 내의 모든 매체의 제작배급 및 전시를 통제합니다. 히틀러는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을 엄청 지지했지요, 영화가 진실로 국민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리라는 신념을 가진 히틀러는 리펜슈탈에 의지하여 영화를 만들어 내라고 요구합니다. 리펜슈탈은 철저하게 애국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내지요, 정권의 간섭에서 벗어나 영화 작업을 했습니다. 투쟁의 의지가 아닌 예술의 의미로서 말입니다. 1934년 독일 정당대회를 찍은 <의지의 승리>(1935)는 독일 국민의 자부심을 갖게 했습니다.

반면, 불길한 공포를 느끼게도 했는데요, 히틀러의 지도력에 존재하는 악마적인 성질과 이를 증명하는 인간성의 결여에 대해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미국은 이 당시, 대공황 상황입니다. 이때 모든 미디어 매체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낙관주의로 일관하는 정부의 선전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사진연맹은 기아에 허덕이고 보금자리에서 쫒겨나 공원이나 철로 변에 움막을 짓고 사는 사람, 파업과 항의 현장을 기록하는데 전념했지요, 정부가 주로 주도 하여 다큐멘터리계를 장악하게 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취임 후 더욱 폭넓은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영화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갖은, 로렌츠는 정부 예산으로 영화 찍습니다. <평원을 일구는 괭이>와 <강>입니다. <강>은 뉴딜정책에서 관심이 있는 여러 문제점을 찍어 사업의 정당성을 부여한 작품입니다. 이후 점차 정부의 다큐멘터리 예산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원래 체제인 민간이 주도하는 형태로 돌아갑니다. <시간의 진행>(1935)은 이 형태로 제작된 영화인데요, 뉴스 영화의 혁명 '진실로 충실한 조작'으로, 배우를 출연시켜 영화를 진행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전쟁과 사회 문제를 다큐멘터리영화로 기록했고, 형식적인실험도 계속되어 집니다. <상해>는 전쟁의 황폐함을 기록했고, <고바야시 잇사>(1940, 가메이)는 황폐한 땅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농민의 생활을 고바야시의 시조를 빌려 풍자적으로 표현합니다. 허가를 받은 자만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포고령을 내렸고, 예방구금법을 제정하여 위험인물을 체포할 수 있는 조치를 1939년에 취하게 되었어요, 가메이는 자격발탈을 당했고 1941년 10월 체포되어 거의 2년간 감옥에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다큐멘터리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삶은 우리에게 속한다> (1936, 장르누아르),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을 가지고 있구요, <전선의 대중>은 화면 밖 해설을 사용하여 변화를 시도 합니다. 변사와 같은 형식이죠, 이것은 차츰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있어 상투적인 수단으로 쓰이게 됩니다.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다큐멘터리영화 제작자들의 활동의 힘입어 여러 기법들이 발전하게 되는데요, 네덜란드의 요리스 이벤스: 초기 <다리>, <비>에서 보여줬듯 운동의 패턴을 다루었고, <새로운 대지>, <보리나제>와 같은 작품으로 사회문제를 파고들었으며, 말기엔 <4억>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줬듯 품성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이벤스는 폭발의 굉음에 휩싸여 어떠한 문제를 놓고 탐색하기보다는 행동 나팔을 울리는 시대의 작가가 됩니다.

이 시기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정부의 개입(돈, 검열)안에서도 선전가와 예술가 사이를 적절히 오가며 활동했다는 것이 포인트!


예술이 뭐라고?


예술이 뭔지에 대한 논점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번 시간에도 ‘화가, 영상으로 그린 수채화’에서 잠깐 언급했었는데, 예술의 의미, 존그리어슨의 의견과 비슷하다. 예술이 힌트를 주지 않으면, 그러니까 삶에 있어 살아가는데 힌트를 주지 않으면, 예술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장에서 예술에 대한 생각보다 계몽이라는 말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영화와 예술과 대중을 분리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하는 자신이 계몽적인 것에 너무 주의를 기울인 것 같아서 감독으로서 너무 우쭐해하는 것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아서 조금 거슬렸다. 영화로 사람을 가르치려는 것 같은 느낌? 권위의식이 너무 있는 것 아닌가?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권위의식이라기 보단, 내가 미디어 운동을 처음 시작 했을 때, 의무감을 조금 설명하고 싶다. 사실 이런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를 그만두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지금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무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왜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냐면, 아무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해야겠다. 라는 의무감을 느꼈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도구로써 미디어를 활용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말한 계몽이라는 말도 이 의미였던 것 같다. ‘누구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해야 겠다’는 그런 심정에서 계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까..

나도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라는 의미를 해석하고 싶다. 그 단어 자체는 가르친다는 의미가 있다. 얼마 전, 노동관련해서 작품을 했을 때,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사실을 고쳐줘야 겠다는 인식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계몽을 하려는 마인드가 있었던 것 같다. 계몽의 마인드가 과용되지 않도록 경계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야 될 것 같다.

예술을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계몽을 이야기 하게 됐는데,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몇몇 사람을 위한 예술, 영화가 아니라, 인종을 막론한 모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예술,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진 않겠지만..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예술은 정말 힘들 것 같은데..


어떤 영화든, 재미의 영역을 확장시키면 되는데 재미의 영역이 한정되어있는 것 같다.
모든 이들을 만족시킨다는 것 보다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지 방법적인 측면에서 고민을 하면 재미도 따라오는 것 같은데.. 사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재밌게 만들려면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 된다. 예술, 재미, 다 고민이 필요한 건 당연한 것인데.. 너무 어렵다.


이 후,
국도예술관에서 상영하는 ‘트루맛쇼’를 보기위해, 서둘러 토론을 마무리 했습니다. ‘트루맛쇼’에 대한 생각들은 어떠했을까요?

 
 GV까지 함께한 저는, 솔직히 너무 지루한 GV였습니다. 영화는 너무 재미있었는데, 방송PD 를 하셨던 감독님의 내공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유쾌하려고 노력하시는 감독님에 비해, 방송가에 일어나고 있는 광고의 역할이나, 체제에 대해서 너무 궁금한 관객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조금 지루한 GV였습니다.

  TV에서 나오는 맛집들이 맛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맛집을 광고하는 것이라던 감독의 메시지. TV 속의 맛집들은 맛이 갔고, 시청률과 아이템만 쫓는 프로그램들에 엄청난 질타를 가한 작품입니다. 사실 1시간 30분 짜리 맛집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았어요. 내용과 형태는 방송PD 출신의 감독님이라, 지루할 틈 없는 진행이었지만, 기존 프로그램 인용이 위주였기 때문에, 또 형식면에서도 감독님의 의도가 기존 방송프로그램을 꼬집는 것이어서 똑같은 형태로 똑같이 비판하겠다는 의도 때문에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아무쪼록, 국도예술관에서 상영이 <6월 10일 금요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관심있으신 분들 꼭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름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