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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표,김작가의 끄적끄적

다큐잡담 - <액트 오브 킬링>



주의 : 이 글은 김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을 끄적거린 것이지만 반박이나 코멘트 해주신다면 겸허히, 감사히 받겠습니다~

말그대로 잡담이니 멋진 비평글을 기대하셨다면 기대감을 살짝 죽이시길~ 




‘우리나라는 차라리 양반이구나.’

2014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액트 오브 킬링>을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충격을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다큐멘터리. 그러나  이것이 나의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액트 오브 킬링>은 덴마크의 다큐멘터리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작품. 인도네시아의 단면을 그저 관찰하듯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감독이 1960년대 인도네시아의 군부독재시절 일어난 대량학살사건의 중심 인물들을 찾아가 그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달라는 부탁을 할 때, 순간 나는 감독이 미쳤다고 생각했다.(이 때의 미쳤다는 긍정과 부정의 뜻이 모두 포함된다. 그때의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더 가관이다. 흔쾌히 요구를 수용하며 신난 아이의 표정을 하고 있다. 제정신이 아닌 인간들을 미친 감독이 담아내겠구나. 경악과 호기심, 두려움이 오묘하게 섞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지 짐작조차 가지않는. 


그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재연한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오히려 자신이 잘한 일을 칭찬해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어린아이처럼 그들은 아주 태연하게 살인의 순간을 재연한다. 

헤실헤실 웃으며 사람의 목에 철사를 감아 있는 힘껏 당길 때,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입이 벌어지고, 소름이 돋는다. 그리곤 이건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하다 말하는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한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그 당시 학살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안와르 콩고’가 있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을 중심으로 그가 속해있는 단체의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한다. 학살의 당사자들이 만들어가는 영화라 충격은 배로 다가온다. 영화 속 학살장면은 매우 사실적이고 잔인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했던 당연한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일뿐이다. 영화의 중간중간에는 안와르 콩고를 중심으로 유려하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화려한 미장센들이 배치된다. 그들에겐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이었을지 몰라도 스크린 너머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이 기괴한 조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그들을 추앙하고 있었다. 국영방송에서 그들의 일화를 토크쇼로 내보내고, 모두가 자랑스럽게 당시 상황을 떠들어댄다. 아나운서의 ‘인도주의적인’이란 말에는 소리나게 실소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인도주의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다니. 그들이 학살의 과정을 태연하게 예술이란 이름으로 둔갑시키는 일이 저 나라에선 박수를 받을만한 일이겠구나 생각하니 허탈했다. 으리으리한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사는 집오리를 보살피고, 손주들을 끌어안고 여느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온화한 미소를 지을 때는 혼란스럽다. 저 사람은 본래가 악한 사람일까, 아니면 나라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낸 걸까…. 저 사람이 인도네시아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념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모습이었을까. 





내가 그를 지켜보며 악인의 잣대를 한참 들이대고 있을 때, 그의 견고함에 균열이 생긴다. 그는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 처음으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연기한다. 남의 목에 걸던 철사줄을 처음 자신의 목에 걸었을 때, 그는 흔들린다. 안와르 콩고의 두려운 얼굴이라.. 생경했다. 선배에게 들었던 ‘기적적인 순간’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면 감독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는 순간… ’기적’이란 단어를 쓰기엔 부적절하겠지만, 반성이라곤 모를것 같던 그의 흔들림은 또 다른 충격을 던졌다. 살인을 항상 정당화 한 것과 영화를 제작한 것 모두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로 시작되었으니까. 자신을 정당하다 말하기 위해 시작한 일로 자신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는 끝내 처절한 헛구역질을 한다. 짐승의 소리를 내며, 속에 있는 것들을 다 쏟아붓기라도 할 듯이. 

그가 정말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안와르 콩고의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이 꽁꽁 묶여 쳐박혀 있다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을 쏟아낼지 말지는 그가 선택할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목에 철사줄을 감고 있는 희생자의 대표격 되는 사람이 안와르 콩고에게 금메달을 걸어준다. 자신들을 살해해서 천국으로 보내준 것이 감사하다고 말하며. 어쩌면 그가 만들어낸 이 기괴한 영화는 그가 숨기고 싶은 감정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르겠다. 과장된 인물, 과장된 미장센, 우스꽝스럽고 잔인한 상황들.. 다큐멘터리가 끝날때 까지 당최 이해되지 않던 안와르 콩고의 영화가, 그가 벌이는 일종의 발악으로 느껴지자 말도 안되는 측은지심이 생겼다. 감독이 어떤 생각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을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마주하게 만든 그의 도발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최고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두고두고 곱씹으며 잊지 못할 다큐멘터리가 될 것은 분명하다. 


며칠 후, 대한민국에선 수많은 고등학생들과 일반인을 싣고 항해하던 배가 가라앉는다. 생존자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찬 바다속에 갇혀 있다. 눈물과 한숨은 마르지 않고, 나라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뒷짐을 지고 헛기침만 하며 서 있을 뿐.


나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행적을 설명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안와르 콩고가 떠올랐다. 그는 학살이 누군가의 지시로 행한 일이며, 늘 자신은 정당하다고 빳빳한 자세로 말했었다. 물론 맥락이 다른 일이지만, 왜 자꾸 겹쳐보이는 걸까. 당장을 수습하기에 급급한 이 나라의 일꾼이란 사람들, 제대로된 보도조차 하지 못하는 주류언론. 

그저 비난받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나을게 뭐란 말인가. 내가 영화를 보며 한참 멀었다 섣부르게 말했던 인도네시보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보고 나서 뜻을 검색했더니 ‘살육 또는 살인행위’가 가장 맞는 번역이라고 하더라.이제는 보기도 싫은 뉴스들이 꾸역꾸역 들려올때마다, 인터넷 헤드라인 제목을 아프게 훑을때도 나는 자꾸 이 단어가 떠오른다.


‘액트 오브 킬링.’ 


이 나라가 저지르고 있는 ‘액트 오브 킬링’을 멈출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지.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