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배일 일개 감독이 부산 민예총 웹진에 칼럼을 쓰기로 했습니다.

안되는 글빨 올려보려고 정기적으로 글쓰기로 맘 먹었다네요.

괌심있게 읽어봐주시고, 상처 받지 않을 정도의 비판 해주세요~

(일개 감독 소심한 거 다들 아시죠~)

부산 민예총 웹진 떠들썩: http://talk.openart.or.kr


 

 

 

 

나의 다큐멘터리와 정치


결국 품고 있던 베개를 집어 던진다.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사방에 날려댄다. 같은 무늬가 반복되는 벽에 이마를 박는다. 아무 죄 없는 리모컨을 땅바닥에 팽겨 치며 TV를 끈다. 요산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해 통풍을 앓고 있는 난, 곡주를 먹으면 극도의 고통이 따라옴에도 불구하고 집에 남아있던 맥주를 깐다. 냉장고에 있던 시원한 맥주도 부글부글 끓는 내 마음을 식힐 수 없다. 

'아! 결국 이렇게 지는 건가? 앞으로의 4년마저도 짙은 암흑으로 빨려들어가는 건가!' 

2012년 4월 12일 새벽, 난 다시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를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총선 결과에 하염없이 한숨만 쉬었다.


2006년 겨울 난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10편 이상의 단편영화를 연출했지만 봐주는 사람도,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은하도 영화계에서 은퇴한 마당에 미련 없다고 자위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대학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에 카메라를 들고, 옆집 노부부의 일상을 따라다녔다. 3개월의 기획, 촬영, 편집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 이면엔 가난이 있었다. 그 속엔 추위가 있었고, 병든 삶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좌절이 있었다. 그 속에 없는 유일한 한가지, '희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난 내가 카메라를 놓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나의 카메라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난과 추위와 병든 삶과 눈물과 좌절을 알리고, 사람들과 함께 희망을 찾는 매개체가 된다면, 내가 만드는 작품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조금 더 카메라를 들어도 되지 안을까!! 이후 난 노동자, 여성, 장애인의 삶을 따라다니며 지금까지 독립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다큐멘터리감독으로 살아온 이후 네 번의 큰 선거가 있었다.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까지... 단 한번도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2007년 기업 CEO에게 대한민국을 인수시키고, 2008년 그의 간부들에게 대한민국의 요직을 맡긴 후부터 난 눈코뜰새 없었다.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며 미친 쇠고기를 정부에게 양보하라고 외칠 때, 언론장악을 위해 동의대 신태섭 교수를 KBS 이사직에서 자르려고 할 때, 4대강 삽질로 삼락둔치 농민들이 일터에서 쫓겨 나갈 때,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크레인에 올라가고 그녀를 살리겠다고 희망버스가 달릴 때, 쌍차해고노동자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을 때... 분노에 휩싸여 카메라를 들었고, 어떻게 알릴까 고민했다. 나를 포함한 독립영화인들은 대한민국의 CEO가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기 바빴다. 수습되지 않길 바라며 사업을 추진해왔던 CEO와 간부들은 우리가 눈의 가시였을게다. 이윽고 그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다. 


최초의 독립영화라 불리는 '상계동 올림픽(연출: 김동원)'은 88서울올림픽을 위해 도시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달동네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쫓겨나게 돼버린 세입자들의 투쟁을 다룬 작품이다. 당시 언론은 88올림픽의 성공을 위한 여론몰이에만 열을 올렸지, 재개발 세입자들의 아픔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후 독립영화는 기성 언론이 관심 가지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는 곳에 들어가, 그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올곧이 전하는 것에 힘을 쏟았다. 세상이 조금씩 바뀌면서 독립영화의 필요성이 높아졌고, 영화 정책에서도 독립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사업들이 생겨났다. '독립영화 제작지원 사업', '미디어센터 사업',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 상영사업'등 기획에서 제작, 배급까지 전반적으로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사업이 생겨났다. 독립영화가 발전함에 힘입어 한국 영화의 양과 질이 높아졌다.


대한민국을 철저히 사유화 하려했던 이들은 독립영화를 좌파 의식을 고양시키는 매체로 생각했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독립영화의 첫 디딤돌을 마련해주는 미디액트 사업권을 회수했다. 미디액트는 시민들이 미디어에 접근 할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을 생산하고, 퍼블릭액세스와 독립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장비 지원 및 교육하는 곳이다. 미디액트 사업권 회수를 시작으로 전국의 미디어센터 예산을 줄이고, 사업의 방향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미디어센터 사업의 방향을 흐려 놓는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영화 전용관지원 사업을 없는 일이었다.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이 생기긴 했지만 작년 'G20'이 있을 때 'G20영화제'를 기획하는 등 사업의 목적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독립영화제작 지원금 역시 매년 줄어들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제작 여건이 힘든 독립영화를 더욱더 위축 시키고 있다. 독립영화가 사라진다면 소외된 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부각 시키려는 노력이 줄어들 것이다. 독립영화가 사라진다면 왜곡되어 드러나 있는 세상의 이면을 더욱더 알기 힘들 것이다. 독립영화가 사라진다면 대중들 입맛에 들어맞는 스토리와 미학만 살아남아 영화 발전에 큰 저해가 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정치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단 한사람이라도 억울한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삶을 깊숙이 들여다봐야한다. 그리고 다함께 웃을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이 정치하는 것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단 한사람의 억울한 눈물이 없도록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그들의 삶을 진실하게 담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함께 변화를 꽤 할 수 있게끔 매개체가 되는 것이 독립다큐멘터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정치를 하고 있다. 


맥주를 마신 후 멍하니 천장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묻고 물었다. 

'착각하고 있었구나!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어!'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말만 듣고, 분위기에 이끌려 오해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곳에 투표도장을 찍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결론이 나니 어리석은 내가 원망스럽고, 꼼꼼하지 못했던 내가 부끄럽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다짐한다. 더 깊이 들여다보자! 더 넓게 이해하자! 더 많이 뛰자! 

2012년 4월 12일 오후, 나와 내 다큐멘터리 그리고 나의 정치는 반성과 후회와 다짐으로 한발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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